<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일본어판 작가 후기
일본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지금 제주도 남단에 있는 작은 섬, 가파도에 있습니다. 9월부터 시작해 3개월에 걸친 일정으로, 섬 한쪽 끝에 있는 창작 레지던스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가파도는 산도 언덕도 없는 평탄한 지형이라, 여기는 강한 바닷바람을 피할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벼농사 같은 건 엄두도 못 냅니다. 여러 차례 경작을 시도한 끝에 주민들은 청보리만큼은 바람에도 지지 않고 잘 견딘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봄에는 이 청보리가 바람에 날려 파도친답니다. 이 섬에 오기 전에는 그저 관광지의 아름다운 풍경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지금은 저를 감탄하게 합니다. 대단하구나. 바람에도 지지 않는 생명이란.
이야기가 갑자기 옆길로 새서 죄송하지만, 저는 이 소설의 주인공 카밀라가 청보리 같은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소설을 쓰기 시작할 때마다 제 마음은 두근두근합니다. 이번에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저도 처음에는 제가 쓰는 소설 주인공이 어떤 인물인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알게 되고 사랑에 빠지게 될 때처럼 저는 제가 쓴 주인공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면서 때로는 놀라기도 합니다. 이 소설을 쓰면서 제가 가장 놀랐을 때는 카밀라가 "누구도 자기 인생의 관광객이 될 수는 없잖아요?"라고 말했을 때였습니다. 틀림없이 카밀라는 저보다 몇 배는 더 강한 사람입니다.
카밀라는 특별히 용감해서 그런 말을 한 게 아닙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카밀라 역시 지금, 이 순간이 자신에게 주어진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의 인생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존재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존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누구나 용감해지는 법입니다. 즉, 카밀라는 용감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도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 앞에 놓인 이 인생을 사랑하자고. 이 삶은 무엇도 미워할 구석이 없는 삶. 아름다운 삶입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본다면 돈이 없거나 병을 앓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자신의 시선으로 본다면 명백히 이 삶은 아름다운 삶입니다.
가파도에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태풍이 닥쳤습니다. 태풍은 섬에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휩쓸어가기 때문에 주민들은 가파도를 떠나 제주도로 가, 태풍이 지나가길 기다립니다. 저도 그렇게 했습니다. 제주도에 있는 호텔에서 묵는 동안 비가 내리고 강풍이 불었습니다. 우산이 망가지고 아무 데도 갈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기다렸더니 태풍이 지나가고 해가 났습니다. 태풍이 언제 왔는가 싶을 정도로 파랗고 맑은 하늘을 보고는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주민들과 함께 여객선을 타고 섬에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관광객이 아닌 주인공으로 사는 한, 이 인생은 재개관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 소설을 일본에 소개하는 데 힘써주신 마쓰오카 유타 씨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바다를 건널 수 있도록 제 소설에 날개를 달아주신 분입니다. 감사합니다.
2020년 9월 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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